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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라기에 먼 가상자산, 차라리 상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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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라기에 먼 가상자산, 차라리 상품이다

[임수강의 진보금융 찾기] 부의 집중화를 부채질하는 가상자산

비트코인 지지자들은 비트코인의 장점 가운데 하나로 탈중앙화를 내세웠다. 이들은 비트코인 보유자들이 다수결 투표를 통해 내리는 합의 기반 의사결정 구조가 금융 민주화를 향해 가는 길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비트코인이 다수의 사람들에게 분산되어 있는 상황을 가정한다. 만약 비트코인이 소수의 손에 집중되어 있다면, 또는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면 의사결정의 권한은 분산이 아니라 오히려 집중 현상을 보일 것이다. 그때는 비트코인이 부의 불평등한 분배를 촉진하는 수단으로 기능할 것이다. 실제로 여러 객관적인 자료들은 비트코인(그리고 알트코인)이 그러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비트코인으로 대표되는 가상자산은 처음부터 부의 불평등한 분배를 촉진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안고 있었다.

보수적인 이념에 맥이 닿아 있는 가상자산의 탄생

비트코인으로 대표되는 가상자산이 부의 불평등한 분배를 촉진하는 기능을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등장 배경을 살펴보아야 한다. 비트코인의 탄생은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를 처리하는 국가(중앙은행)들의 대응과 관련이 있었다. 더 멀리는 위기가 터지기 한 세대 이전부터 금융자산의 성장을 뒷받침했던 국가(중앙은행)들의 금융정책과 관련이 있었다.

선진자본주의 경제는 1980년대부터 금융자산이 급격하게 성장하는 모습을 경험한다. 주식, 채권, 수익증권, 부동산 담보증권과 같은 금융자산의 규모가 1980년에는 실물자산 규모와 비슷한 수준이었지만 2000년에 이르면 거의 네 배 수준에 이른다. 이렇듯 금융자산이 성장한 데에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국가(중앙은행)의 금융자산 우호적인 금융정책도 한몫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정부들은 금리, 화폐량 조절, 금융 규제 완화 등을 통해 금융자산의 성장을 뒷받침하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러한 정책은 금융자산가들에게 유리한 방향이었다.

문제는 금융자산의 가격이 미래 소득의 흐름에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금융은 직접 가치를 생산하는 부문이 아니다. 금융 부문은 생산적인 부문의 가치 생산을 지원한 대가로 거기에서 부가가치의 일부를 넘겨받는다. 다시 말해서 금융 부문은 그 존재의 근거를 생산 부문에 의존한다. 이러한 금융의 특성은 금융 부문이 생산 부문과 완전히 동떨어져서 독자적으로 성장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생산 부문이 제공할 수 있는 소득 흐름에 비해 금융이 과도하게 성장하면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금융자산의 가격이 폭락하는 위기가 발생한다.

실제로 1980년대 이후 금융자산의 축적이 급격히 진행되면서 금융위기의 발생 빈도도 늘어갔고 위기 규모도 점차 커갔다. 예를 들어 1990년대 초에는 북유럽 국가들의 위기, 멕시코 위기가 발생했고 1990년대 후반에는 더 큰 규모의 동아시아 위기, 러시아와 남아메리카 위기가 나타났다. 그리고 2008년에는 자본주의 중심부에서 진정한 의미의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금융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자본주의 정부들은 금융자산의 가격을 유지하는 데에 정책 역량을 모았다. 2008년 위기 때는 정부(중앙은행)들이 전에 볼 수 없었던 수단과 규모로 자산 가격을 유지하기 위한 정책대응에 나섰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이른바 '최후의 마켓 메이커론'에 바탕을 둔 양적완화 정책이었다. 금융위기 때는 중앙은행이 최후의 대출자 기능을 넘어서 시장 조성자 역할까지 해야 한다는 것이 마켓 메이커론의 핵심 주장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 중앙은행이 자산 가격의 유지까지 책임을 지기 위해 편 정책이 양적완화이다. 2008년 위기 때 미국 연준 의장으로서 양적완화 정책을 주도한 버냉키는 이 정책의 목표가 자산 가격의 유지에 있다는 점을 명백히 설명한 바 있다.

양적완화 정책은 국가의 재정과 발권력을 동원하여 자산 가격을 떠받치고 나아가 금융기관을 구제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런데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구제 범위가 무한대로 확대되었다. 원래는 은행만이 중앙은행의 구제대상이었지만 이때는 투자은행, 보험사뿐만 아니라 투기에 실패한 온갖 펀드들도 구제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구제 대상에 노동자들이나 일반 국민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금융의 이익을 위한 주요 국가(중앙은행)들의 비대칭적인 권한 사용은 정치적인 논란과 함께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과 같은 대중들의 반발을 불렀다.

대규모 구제금융을 계기로 공적인 돈의 사용을 둘러싼 정치적인 논쟁이 펼쳐졌다. 핵심 쟁점은 위기 때 국가(중앙은행)가 수행해야 하는 역할에 대한 것이었다. 한 쪽의 흐름은 국가(중앙은행)의 정치적인 힘과 역할을 인정했지만 다른 쪽의 흐름은 이를 부정했다. 전자의 흐름에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주로 가담했고 후자의 흐름에는 주로 보수주의자들이 가담했다. 학문적으로는 케인스주의에 친화적인 사람들이 전자의 흐름에 속했고 하이예크주의에 친화적인 사람들이 후자에 속했다.

진보주의자들은 현재의 신자유주의 국가가 민간금융의 경제적인 힘과 동맹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들은 국가와 금융의 동맹 관계를 해체하고 민주적 책임을 갖는 금융시스템을 구축한다면 국가의 정치적인 힘을 노동자들이나 일반 국민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진보주의자들은 부자들의 자산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중앙은행)가 동원하는 발권력을 노동자를 위해서 쓰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지를 따졌다. 이들의 논리는 현대화폐이론의 정치 프로젝트로 가다듬어졌다. 이 프로젝트의 가장 특징적인 면은 국가(중앙은행)의 권위와 능력을 인정하고 이것을 고용 보장이라는 진보적인 의제와 결합시키려고 한 데 있었다.

보수주의자들은 국가를 전제주의의 보루로 공격했고 상업은행과 중앙은행 위계로 구성된 금융시스템에 대해서도 공격을 퍼부었다. 이들은 금융위기와 그에 따른 구제금융을 피하기 위해 화폐 발행의 민영화와 화폐 문제의 탈정치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보수 경제학자인 하이예크의 철학에 맞닿아 있다. 하이예크는 이미 1976년에 화폐의 탈국유화 구상을 발표했다. 경쟁화폐론이라 불리는 이 구상의 핵심은 정부가 독점하고 있는 발권력을 폐지하고 화폐발행을 시장경쟁에 맡기자는 데에 있다. 누구든 시장에서 화폐를 발행할 수 있게 하고 그러한 화폐들이 서로 경쟁하게 만들면 안정적인 화폐가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선택된다는 것이 하이예크의 논리였다.

비트코인의 설계도는 이러한 보수적인 지적 전통과 맥이 닿아 있다. 비트코인 설계자인 나카모토 사토시는 2008년에 그의 아이디어를 발표하면서 비트코인이 개인과 개인 사이의 네트워크에서 사적으로 발행(생성)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또한 비트코인의 거래가 중앙 집중식 기관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도 강조했다. 비트코인의 기반이 되는 블록체인 기술을 제외한다면 비트코인 발행과 거래의 전체 메커니즘은 하이예크의 논리를 닮아 있다. 비트코인이 이처럼 보수적인 이념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사실을 우선 기억해 두기로 하자.

가상자산 열풍을 부른 핵심 요인은 양적 완화

그렇다면 가상자산의 특징은 무엇이고 그 가격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나카모토 사토시는 비트코인이 현행 화폐에 대한 대안 화폐임을 명백히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비트코인이 화폐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화폐가 화폐로서 기능하려면 계산 단위 기능, 유통수단과 지급수단 기능, 가치의 저장 수단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그런데 비트코인은 예컨대 계산 단위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계산 단위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일차적인 조건은 가격의 상대적인 안정인데, 비트코인의 가격은 심하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을 보인다.

만약 비트코인이 화폐로서 계산 단위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해보자. 그때 비트코인의 가격이 10배 오른다면 다른 상품들의 가격은 10분의 1로 떨어져야 할 것이다. 어떤 상품의 가격이 단기간에 10분의 1 토막이 난다면 그것을 생산하는 기업은 버티기가 어려울 것이다. 비트코인은 유통수단 기능이나 가치저장 수단 기능과 같은 화폐의 다른 기능들도 잘 수행하지 못한다. 따라서 비트코인을 화폐로 보기 어렵다. 국제통화기금(IMF) 같은 국제기구도 큰 가격 변동성을 갖는 비트코인이 화폐 기능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한다.

비트코인으로 대표되는 가상자산은 금융자산과도 다른 특징을 보인다. 주식, 채권, 대출, 파생상품과 같은 금융자산의 발행은 반드시 부채의 생성을 동반한다. 예컨대 어떤 기업이 채권을 발행하여 누군가에게 팔면 사회 전체의 금융자산이 늘어나지만 그 기업이 채권 만기일에 원리금을 상환해야 한다는 점에서 부채도 함께 늘어난다. 그렇지만 비트코인의 발행은 부채의 생성을 동반하지 않는다. 이처럼 비트코인의 발행에는 부채의 생성이 뒤따르지 않기 때문에 비트코인이 마치 "디지털 금"이나 되는 듯한, 새로운 부를 대표하기라도 하는 듯한 환상이 생겨난다.

비트코인은 오히려 상품과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Tomás N. Rotta & Edemilson Paraná 2022.3). 고전경제학에 따르면 상품의 가치는 기존의 다른 상품(원재료나 기계)의 가치에서 이전된 부분과 노동자들이 새로 생산한 가치 부분으로 구성된다. 자동화 프로그램으로 진행되는 비트코인의 생산에는, 회계학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컴퓨터 감가상각비나 에너지 비용은 들어가지만 노동력은 거의 투입되지 않는다. 그런데 부가가치는 살아 있는 노동력이 투입될 때에만 생산된다. 그리하여 비트코인이라는 상품은 가치는 갖지만 부가가치를 생산하지는 못한다는 특성을 나타낸다.

비트코인이 상품과 유사한 특징을 갖는다는 사실은 비트코인이 달러 패권에 도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알려준다. 현재 비트코인은 거래소를 통해서 상품처럼 거래되고 있고 거래 대금은 달러, 유로 등으로 결제된다. 이는 비트코인 거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결제수단으로서 달러와 유로에 대한 수요도 비례해서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러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 달러의 힘은 강해지는 것이지 약해지는 것이 아니다. 비트코인은 달러 패권에 도전하기는커녕 오히려 달러 패권을 강화시키고 연장시키는 기능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 10여 년 동안 비트코인의 가격은 왜 가치(회계학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원가+마진)를 훨씬 뛰어넘어서 급등했을까. 비트코인의 가격 형성이 일반 상품과 다른 예술품처럼 거의 수요 상태에 의존하는 탓이 크다고 봐야 한다.

비트코인의 수요에 영향을 준 요인은 몇 가지가 있다. 먼저, 이념과 관련된 요인이다. 글로벌 위기 이후 보수주의자들은 비트코인을 사용하는 것이 국가(중앙은행)의 규제에서 벗어나는 길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동조했다. 이 보수주의자들이 비트코인의 주요한 수요 계층을 구성했다. 여기에 세금을 빼돌리려는 자들, 불법 거래와 엮인 자들도 가세했다. 일부 진보주의자들마저 비트코인의 해방력이라는 다소 허황된 믿음에 이끌려 수요 계층에 참여했다.

블록체인 기술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낙관하는 기술주의는 비트코인 수요를 자극하는 또 다른 이념이었다. 비트코인 옹호자들이 블록체인 기술과 비트코인을 불가분의 동일체로 선전한 것이 먹힌 점도 비트코인 수요 자극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실 비트코인은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한 하나의 분야에 지나지 않는데도 비트코인 옹호자들은 마치 비트코인 없이는 블록체인 기술이 성립할 수 없는 것처럼 선전했던 것이다.

비트코인 수요에 무엇보다 큰 영향을 준 요인은 2008년 위기 이후 연준을 비롯한 주요 중앙은행들이 편 양적완화 정책이었다. 양적완화 정책으로 자금시장이 여유로워지면서 부유층은 낮은 금리로 돈을 빌려서 부동산, 예술품, 원자재 등을 사 모았고 '새로운 투자 대안'의 하나로 비트코인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비트코인은 가치가 가격에 비해 미미하기 때문에 언제든 가격이 폭락할 수 있었지만 구매자들은 그것을 사줄 또 다른 구매자가 있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비트코인 구입을 늘려나갔다. 비트코인 구매자들은 경제학에서 말하는 '더 큰 바보' 이론을 따른 것이다.

▲가상자산은 화폐가 아니라 디지털 상품에 가깝다. ⓒQuoteInspector.com

가상자산을 통한 부의 집중 메커니즘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비트코인은 화폐가 아니라 이익을 위해 생산되는 디지털 상품에 가깝다. 비트코인은 비록 가격에 비해 형편없이 낮은 수준이기는 하지만 가치를 가지며, 그러나 부가가치는 생산하지 않는다. 비트코인의 채굴은 새로운 부나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부나 세계의 다른 생산부문에서 생산한 부가가치의 풀에서 재분배할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부를 불평등하게 분배할 가능성과 함께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생산 부문을 위축시킬 가능성을 내포한다.

비트코인이 경제학적 의미에서 새로운 부나 부가가치를 만들어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의 생산과 거래는 비생산적인 활동으로 분류되며, 그러한 활동은 총 구매력의 면에서 볼 때는 제로섬 게임을 구성한다. 엄밀하게 얘기하자면 제로섬 게임에서는 부나 부가가치가 평등하게 재분배될 수도 있고 불평등하게도 재분배될 수도 있다. 그러나 비트코인이 독특한 상품으로서 갖는 특징은 부와 부가가치가 불평등하게 분배되도록 한다.

비트코인이 상품의 특징을 갖지만 그 가치와 가격 사이의 격차가 크다면 비트코인을 발행할 때, 마치 화폐를 발행할 때와 마찬가지로 시뇨리지(seigniorage, 주조이익)가 생길 수 있다. 화폐 발행의 시뇨리지란 가치가 낮은 화폐를 높은 가치로 유통시킬 수 있을 때 생기는 차익을 말한다. 예를 들어 미국이 3센트를 들여서 만든 액면 1달러 지폐를 실제로 1달러의 가치로 유통시킬 수 있고 그 지폐가 유통에 계속 머문다면 미국은 1달러를 발행할 때마다 97센트의 차익을 얻을 수 있다. 이 차익이 바로 시뇨리지이다.

만약 비트코인 최초 설계자가 100만 비트코인을 보유하고 있고 그 가격(총액)이 어느 시점에서 35조 원에 이른다면, 그리고 비트코인의 가치는 무시할만한 수준이라면, 세계의 다른 곳에 있는 부나 다른 곳에서 생산된 부가가치가 그만큼 그 설계자에게 재분배되어야 한다. 재분배되는 이 가격 총액은 화폐 발행의 시뇨리지와 유사하다. 주요 가상자산들이 미국에서 설계되고 발행된다면 가상자산의 가격이 상승할 때 세계의 다른 나라들에서 미국으로 부와 부가가치가 재분배되는 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

비트코인의 채굴자와 그 이후의 보유자들 사이에서도 부와 부가가치의 재분배가 나타날 수 있다. 이러한 재분배 효과는 화폐 발행에서 생기는 캉티용 효과와 비슷하다. 유명한 화폐수량설에 따르면 화폐 발행량의 증가는 물가 상승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화폐수량설은 증가한 화폐의 발행량이 국민들의 주머니에 골고루 들어가는 것처럼 설명한다. 화폐수량설은 헬리콥터 머니라는 비유를 즐겨 사용하는데, 이 비유도 헬리콥터에서 뿌린 돈이 국민들 주머니에 골고루 들어간다는 인상을 심어준다.

실제로 헬리콥터에서 돈을 골고루 뿌린다면 재분배 효과가 발생하겠지만 그때는 불평등을 키우는 쪽이 아니라 줄이는 쪽일 것이다. 아이켄그린(Barry Eichengreen)이라는 학자는 중앙은행에 개인별로 디지털 계좌를 개설한다면 실제로 헬리콥터 머니를 현실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중앙은행은 현재와 같은 양적완화 방식 대신 모든 사람의 디지털 계정에 일정액의 화폐를 넣어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분배규칙에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금액을 넣어주는 방식과 기존 보유 금액에 비례해서 넣어주는 방식이 있을 것이다. 전자의 방식으로 화폐량을 늘린다면 불평등을 완화하는 재분배가 이뤄질 것이다.

그런데 증가한 화폐량의 분배에 우선순위를 둔다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증가한 화폐량을 국민들에게 골고루 직접 뿌려주는 것이 아니라 은행 시스템을 통해 자산 담보력과 소득이라는 우선순위를 두고 공급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때는 자산 담보력이 크고 소득이 높은 사람이 더 많은 화폐를 더 먼저 손에 넣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화폐가 공급되는 현실적인 모습이다. 캉티용(Richard Cantillon 1680~1734)에 따르면 화폐 공급량이 늘면 화폐가치가 점차 떨어질 텐데 그러면 먼저 화폐를 분배받아 사용한 사람들은 뒷사람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익을 얻게 된다. 다시 말해서 재분배 효과가 발생한다. 이것을 캉티용 효과라 한다.

비트코인의 채굴에서도 캉티용 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필요한 용량을 갖춘 컴퓨터에 접근할 수 있는 개인은 누구든 평등하게 비트코인을 채굴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론적으로 그러하다는 얘기다. 현실에서는 컴퓨터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이 개인별로 크게 다르고, 그 때문에 불평등을 높이는 재분배 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 바수데반(Ramaa Vasudevan)에 따르면 2015년부터 2021년까지를 대상으로 삼은 연구 결과는 비트코인 채굴자의 0.1%가 채굴량의 50%가량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비트코인 보유도 매우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2021년 말을 기준으로 비트코인 보유자의 0.01%가 전체 비트코인의 26%를 차지하고 있다.

국제결제은행(BIS)이 올해 2월에 발표한 한 연구는 비트코인이 어떻게 부와 부가가치의 재분배에 영향을 주는가를 보여준다. 이 연구는 2015년 8월부터 2022년 말까지 95개국에서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이뤄졌는데, 이에 따르면 투자 규모에 따라서 투자 성과가 다른 패턴을 보인다. 대체로 소규모 투자자들은 손실을 보았고 손실률도 상대적으로 컸다. 국가별로 보면 브라질, 인도, 파키스탄, 태국, 터키와 같은 신흥국가들의 손실률이 컸다. 이는 당연한데, 최초 발행자들이나 대규모 보유자들로 이미 부의 재분배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결국 가상자산의 분산 논리는 부의 집중과 불평등한 분배로 향해가는 기존의 흐름을 역전시키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속화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비트코인을 통한 부와 부가가치의 재분배 과정은 먼저 세계경제의 실물 부문에서 비트코인 부문으로 향하는 흐름으로 나타나고 비트코인 부문 내에서는 채굴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 1,000비트코인 이상 보유한 이른바 고래들, 싸게 사서 비싸게 팔 수 있는 운 좋은 사람들을 향한 흐름으로 나타난다.

가상자산에 대한 정치적인 태도

여러 나라들에서 가상자산을 둘러싼 정치적인 태도는 점차 더 분명하게 분화하는 모습이다. 비트코인 발행 초기에는 일부 진보주의자들마저 블록체인이라는 기술이 갖는 해방력에 혹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들은 비트코인이 추구한다는 탈중앙화, 평등주의, 탈권위주의 이념에 의해 수평적이고 분권적인 경제 질서를 세울 수 있다고 보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마르크스도 탈중앙화와 민주적인 성격을 갖는 비트코인을 지지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일부는 비트코인이 자본주의를 개혁하거나 전복시키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선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트코인으로 대표되는 가상자산의 본질이 점차 드러나면서 진보주의자들의 태도도 달라지고 있다. 진보주의자들은 규제 철폐, 국가의 권위 부정, 자유 지상주의라는 보수주의에 맥이 닿아 있는 비트코인 아이디어가 시민들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쪽으로 의견을 모아가고 있다. 이들은 이제 블록체인이라는 기술과 비트코인이 상품으로서 갖는 성격을 점차 분리해서 생각한다. 진보주의자들은 비트코인이 성장해야 블록체인 기술이 발전할 것이라는 주장에 더는 현혹되지 않는다. 가상자산이 불평등을 촉진하는 지렛대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점차 분명해지면서 이제 진보주의자들은 이를 규제해야 한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해 가는 듯하다.

보수주의자들의 정치적인 태도는 주로 기술주의와 연관되어 있다. 이들은 진보주의자들이 기술을 정치화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기술을 질식시킬 것이 아니라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부는 가상자산을 산업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한다. 그러면서 보수주의자들은 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규제를 강화할 것이 아니라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상자산에 대한 정당별 정치적인 태도가 아직은 분명하게 분화하지 않은 모습이다. 특히 가상자산 규제 문제에 대해 정당들이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여기에는 가상자산을 거래하는 인구가 단기간에 급격히 늘어난 탓이 크다고 본다. 금융정보분석원의 2022년 하반기 가상자산 사업자 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가상자산 규모는 19조 원, 가상자산의 하루 평균 거래 규모는 3조 원, 원화 예치금은 3조 6,000억 원이고 거래 가능 이용자는 627만 명에 이른다. 정당들은 정치적인 지지 문제 때문에 이들 가상자산 거래자들의 목소리를 무시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은 가상자산에 대한 정치적인 태도를 이제는 분명히 해야 한다. 가상자산은 부가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비생산적인 부문에 속할 뿐만 아니라 불평등을 키우는 기능을 한다. 이러한 부문에 수많은 청년들이 매달려서 에너지를 쏟아 붓는 것은 국가적인 낭비이다. 또한 가상자산은 그 속성상 최초 발행국으로 부를 재분배하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는 점도 떠올려야 한다. 이는 개인들이 가상자산 거래를 통해 이익을 볼 수는 있지만 국가 전체로 보면 손해를 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가상자산 시장은 미국, 유럽과 더불어 3대 시장이라고 한다. 가상자산 시장의 팽창이 국민들의 삶에 어떤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것인가? 우리나라는 선물, 옵션 규모도 세계 최상위급이라고 하는데, 그러한 파생상품 시장 규모의 팽창이 국민들의 삶에 무슨 이익을 가져다주었는가? 그런 면에서 진보주의자들은 가상자산에 대한 입장을 더 분명히 드러내야 한다. 블록체인이라는 기술은 가상자산과 결합시키지 않은 채 다른 수단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발전시킬 수 있다.

<도움 받은 자료>

국회 정무위원회,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 등 법안 검토보고서", 2021.7.

금융정보분석원, "2022년 하반기 가상자산 사업자 실태조사 결과", 2023.3.20.

박종현·유승민, "비트코인은 대안화폐인가? : 비판적 검토", <국제금융연구>, 2015.5.1.

아담 레보어, 임수강 옮김, <국제결제은행(BIS)의 역사>, 더늠, 2022.11.

정부 관계기관 합동, "가상통화 현황 및 대응 방향", 2017.9.

Barry Eichengreen, "From Commodity to Fiat and Now to Crypto: What Does History Tell Us?", NBER Working Paper 25426, 2019.1

국제결제은행(BIS); Giulio Cornelli, Sebastian Doerr, Jon Frost and Leonardo Gambacorta, "Crypto shocks and retail losses", BIS Bulletin, No. 69, 2023.2.

Ramaa Vasudevan, "Crypto Convulsions, Digital Delusions, and the Inexorable Logic of Finance Capitalism", Monthly Review, 2022.12.

Tomás N. Rotta & Edemilson Paraná, "Bitcoin as a digital commodity", New Political Economy, 2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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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강

임수강 금융평론가(linsk@hanmail.net)는 정치경제학을 전공한 독립 연구자이다. 증권회사에서 채권 트레이더로 일했고 은행 경제연구소와 금융경제연구소 등에서 연구 활동을 했다. 최근 국제결제은행(BIS)의 역사를 다룬 <바젤탑>을 번역해서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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